CD 프로젝트 이야기

위처 시리즈를 만든 CD 프로젝트 RED의 역사를 다룬 유로게이머 기사를 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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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처 시리즈로 유명한 CD 프로젝트를 방문하려고 폴란드 바르샤바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한 가지 말하지 않고는 못 베길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위처 2는 거의 접힐 뻔했고 회사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2009년이었다. 첫 위처 게임이 나온지 2년, 세계 경제 위기의 물결이 CD 프로젝트의 무릎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첫 번째 게임으로 번 돈은 출시되지 못한 콘솔 게임인 위처: 화이트 울프의 뒤처리를 하느라 다 날려버렸다. 거기에 CD 프로젝트의 근간이었던 폴란드 퍼블리싱/배급 사업은 블랙홀이 되어 돈을 먹고 있었고, GOG는 GOG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만 벌었다.

마르친 이빈스키의 20년 경력 중에서 가장 섬뜩한 순간이었다. “회사는 제 아이입니다. 첫 아이죠.” 그는 내게 말했다. “그리고 딸이 있고 아들이 있습니다. 모두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처의 성공으로 날개를 펼치기는커녕 바닥으로 추락하려는 참이었다. “당시에는 정말 암담했습니다. 굉장히 초조했어요. 아마 그대로 1년이면 월급도 못 주게 되었을 겁니다.”

그건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특히 내 눈 앞에 펼쳐졌던 광경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빈스키는 연와조에 유리 벽, 환기장치가 갖추어져 200명이 일하고 있는 멋들어진 사무실 한 가운데 호사스러운 가죽 의자에 앉아있었다. 안에는 모션 캡쳐 스튜디오와 밝고 현란한 붉은색 화장실, 갑옷 세트, 검, 상패, 새로 나온 채식주의자용 캔이 있었다. 내 주변에는 마이크로소프트가 E3 엑스박스 원 컨퍼런스에서 띄워주었던 위처 3를 만드는 부대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없을지도 몰랐다? “몇 개월의 공포였습니다.” 이빈스키가 말했다. “그런데 무슨 조화였는지 모르겠는데, 어느 순간 저는 이게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그냥 뭔가 다른 걸 해야겠다, 어쩌면 회사를 새로 시작해야지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하룻밤 새에 스트레스가 날아가고 갑자기 새로 힘이 솟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어요. 무슨 불교 이야기 같은데, 뭔가 있었습니다. 제가 애착을 가졌던 만큼 힘이 빠져있었던 거죠. 저희가 일하는 방식과 닮은 점이 많습니다. 사람은 실수를 하지요. 하지만 그 실수에서 배우고 다시 반복해선 안 됩니다.”

CD 프로젝트는 바르샤바 주식거래소에 상장하게 된 역합병 때문에 생존하게 되었다. 3개월 뒤 투자자들이 줄을 이었다. “논리에 어긋나는 이야기 같은데, 그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 게임계의 폴란드인 로키는 로프의 반동을 이용해 한계를 뛰어넘는 펀치를 보여주었다. 단 두 개의 게임과 한 번의 콘솔 이식으로 CD 프로젝트는 혈기 넘치는 무명에서 세계를 흔드는 존재로 성장했다. 하지만 CD 프로젝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다. 단지 마르친 이빈스키라는 이름의 남자아이가, 그가 칭하길, 동유럽의 정글 폴란드에서 살고 있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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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그때도 이빈스키는 게임을 사랑했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게임을 구입한다는 게 불가능했다. 당시 폴란드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사회주의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우던 시기였다. 서양인들이 게임을 하는 멋진 컴퓨터를 당시 폴란드에서는 살 수 없었다. 게다가 대부분 사람들에게 동독을 넘어선 여행은 공상이었다. 하지만 다큐 영화를 제작했던 이빈스키의 아버지는 달랐다. 동독을 넘어 여행할 수 있었던 아버지는 이빈스키에게 컴퓨터를 가져다 주었다. 그 스펙트럼 싱클레어는 “10 PRINT ‘Hello'”로 이빈스키를 매료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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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컴퓨터 시장

하지만 이빈스키는 게임에 굶주렸고 게임을 파는 가게는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폴란드에는 저작권법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주요 도시에서는 주말마다 게임과 비트를 교환하는 컴퓨터 시장이 활기를 띄었다. “확실히 합법은 아니었지요.”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다른 길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이빈스키는 수입된 유어 싱클레어 기기에서 발견한 주소의 그리스인에게 엉터리 영어로 편지를 보냈고, 그것이 이빈스키가 걷게 될 경력의 첫 한 걸음이 되었다. 이빈스키는 빈 테이프에 게임을 복사해 달라고 부탁했고 2주 후 게임이 담긴 테이프가 도착했다. “굉장히 기뻤습니다. 그걸 가지고 주말에 컴퓨터 시장에 가니 저는 슈퍼스타가 되어 있었죠.” 그는 말했다. “그 게임 중 하나인 타겟 레니게이드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훌륭한 게임이었죠.”

그 후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첫 번째는 이빈스키가 고등학교에서 그토록 듣고 싶었던 컴퓨터 강좌 수강 자격을 얻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빈스키는 수리 물리학을 듣게 되었고 여기서 미래의 사업 파트너이자 당시 아타리 게임을 팔고 있었던 미할 키친스키를 만났다. 둘은 금세 친해져서 “곧잘 학교를 빠지면서 게임을 하고 놀았”다.

두 번째 중요한 사건은 CD롬이었다. “당시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게 얼마나 혁명적이었나 모를 겁니다. 블루레이가 다 뭡니까?” 이빈스키는 웃었다. “400장의 플로피 디스크가 CD 한 장에 들어갔습니다. 완전히 판을 뒤바꾼 거였죠.”

CD 프로젝트 이동 사무실. 그들의 첫 번째 자동차는 오랫동안 역할을 했다.
CD 프로젝트의 이동 사무실. 이 첫 번째 자동차는 오랫동안 그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은 누구보다 먼저 게임을 해보고 싶어서 미국 도매상으로부터 매드 독 맥기와 7번째 손님 같은 게임을 수입해 폴란드에서 팔았다. 거기서 사업이 태어났다. “세무서에 가서 문을 두드리고 말했죠. ‘저기, 회사를 시작하고 싶은데 뭘 해야 하나요?'”

그 이름도 적절한 CD 프로젝트(‘체더 프로옉트’, r발음은 굴리시라)는 1994년 봄에 설립되었다. 마르친 이빈스키의 나이 20세였다. 두 젊은이는 2천 달러와 두 사람 소유의 컴퓨터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첫 사무실은 친구 아파트 방을 공짜로 빌린 것이었다. 저희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은 몇 층이고 계단을 올라와서 땀에 흠뻑 젖어 있었죠. “헉헉헉, 헐떡 거리면서 대체 어디에 있소?!, 하고요.”

“재미있게도, 특히 폴란드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이빈스키는 덧붙였다. “‘아, 그러니까 당신 복돌이였구만. 근본이 ‘그’ 컴퓨터 시장이란 거지?’ 그럼 저는 말하지요. ‘그건 당시에 불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저기 폴란드 IT 회사의 사장들과 설립자들과 주주들을 보세요. 그 사람들은 어디서 왔을까요?’ 그 사람들 역시 컴퓨터 시장에서 배운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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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 컴퓨터 시장은 이후 CD 프로젝트를 뒷받침하는 핵심 가치에 중요한 근거를 제공했다. 지금 위처 3를 준비하고 있는 CD 프로젝트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것은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다. CD 프로젝트가 사업을 하는 방식에 대한 보답이다. 다른 회사들이 DRM을 강요하는 가운데 DRM 없는 게임을 옹호하는 회사다. 다른 회사라면 돈 내고 팔 추가 콘텐츠를 선물하는 회사다. 고객을 쥐어 짜지 않고 존중하는 회사다. 그 모든 것의 근본이 이 회사의 성장 배경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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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말 젊었고 사람들이 우리가 진지하다고 생각해주길 바래서 이렇게 잘 차려 입고 있었어요.” 이빈스키(왼쪽)가 말했다.

“폴란드에서 저희의 주된 경쟁 상대는 언제나 불법복제였습니다.” 이빈스키가 말했다. 2차 대전의 폐허 속에서 재건되었고 최근 다시 재건축이 이루어진 워쇼 국립 체육관은 동유럽에서 가장 큰 벼룩 시장의 근거지였으며, 폴란드에서 가장 큰 위조 상품, 게임, 음악의 수출지였다. “게다가”, 이빈스키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유탄 발사기도 살 수 있었습니다.” 게임이 출시되고 약 48시간이 지나면 15 파운드 컴퓨터 게임을 3 파운드에 집어올 수 있었다. “힘든 경쟁이었죠.” 이빈스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빈스키에게 불법복제를 멈출 방도는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대신 정품을 사라고 설득할 수 있다면 어떨까? 아이디어가 있었다. “당시 정말 큰 도박을 했습니다. 발더스 게이트를 계약했어요.”

훌륭한 게임이었으니 폴란드에서 인기를 끌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당시 아무도 하지 않던 현지화를 할 작정이었으니, 당시 학교에서 영어가 아닌 러시아어를 배웠던 시대의 사람들은 게임의 풍부한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발더스 게이트의 CD가 다섯 장이었으므로 CD 한 장에 3 파운드로 파는 해적 장사꾼들도 주저할 것이었다.

인터플레이로부터 3천 장을 라이선스하는 비용은 3만 파운드였고 현지화에도 동일한 비용이 들었다. 거기다 마케팅과 패키지 생산을 하고 인지도를 올릴 한 수단으로 폴란드 유명 배우를 섭외해서 게임의 음성 연기를 맡겼다. “당시에는 정말 많은 돈이었습니다.” 이빈스키는 얼굴을 찡그렸다. “회사 전부를 거기에 걸었습니다.”

발더스 게이트는 30 파운드로 출시되었고 폴란드에서는 비싼 가격이었다. 그 전까지 CD 프로젝트는 보통 15 파운드로 게임을 팔았다. 하지만 발더스 게이트의 패키지 안에는 양피지 지도와 던전 앤 드래곤 룰북, 오디오 CD처럼 해적 장사꾼이 제공할 수 없는 가치가 들어가 있었다. 디스크 다섯 장 게임은 가장 싸게 파는 해적 장사꾼이라면 15 파운드였다. 이빈스키는 15 파운드를 낼 사람이라면 특별한 가치를 위해서 더 많은 돈을 쓸 준비가 되어있길 바랐다.

상자 크기를 좀 보라! CD 프로젝트의 발더스 게이트가 한 한 가득 담겨있다. 이빈스키에게 창고가 하나 더 필요하다고 이상할 게 없다. 큰 스피커 달린 밴은 물론이고...
상자 크기를 좀 보라! CD 프로젝트의 발더스 게이트가 한 가득 담겨있다. 이빈스키에가 창고 하나 더 필요하다고 이상할 게 없다. 큰 스피커 달린 밴은 물론이고…

사람들은 준비되어 있었다. 출시 3개월 전 주문량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5천 장이 6천이 되고, 7천, 8천이 되었다. “당시 폴란드에서는 게임을 다루는 소매 체인점이 하나도 없어서 모든 주문이 도매상과 여기저기 작은 가게들, 컴퓨터 시장에서 왔습니다. 저희 사무실 겸 창고 공간은 5천 장이 한계였기 때문에 주문량을 감당하려고 밖에 창고를 하나 더 잡아야 했어요.”

“그리고 첫 날에 1만 8천 장을 팔았습니다.” 그것은 CD 프로젝트에게 세계의 문을 열어주었고 사업은 궤도를 탔다. 그리고 그것은 가치의 힘을 절감한 교훈이었다.

오늘날 GOG가 온라인 불법복제를 막으려는 노력은 당시 CD 프로젝트가 컴퓨터 시장 불법복제를 막으려고 했던 노력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GOG는 그 모든 힘든 작업을 거쳐서, 게임을 발굴하고 리마스터하며, 기술 지원을 하고, 매뉴얼과 사운드트랙, 가이드를 갖추어서, 좋은 가격에 냄으로써 게임에 가치를 더한다. 그 뒤에는 어떤 조건도 따라붙지 않는다. “저희 핵심 가치는 DRM 프리고 그걸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빈스키는 덧붙였다. “사람들은 정말 이상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불법복제가 성행하는 건 해적들이 제대로 된 게임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게임이 잘 작동하는 데다, 자유롭고, 무엇보다 공짜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은 돈을 낼 생각이 있고 스팀이 그걸 증명했으며 저희도 증명했습니다. 정말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저희가 하는 것처럼 게이머들이 원하는 바에 귀 기울이고 원하는 걸 제공하는 겁니다.”

런칭 5년 후 GOG는 매달 200만 명이 방문하는 사이트가 되었고 매출은 이전까지 매년 두 배로 뛰었다. 이른바 CD 프로젝트 블루로 불리는 이 온라인 배급 사업이 메인 이벤트인 게임 제작사 CD 프로젝트 RED로 다시 투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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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그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빈스키는 말했다. 그는 더 젊었을 때 게임 제작에 도전하고 싶었지만 아미가 시절에 본인이 깨달았던 것처럼 자신은, “구린 프로그래머였습니다.” 이빈스키는 웃었다. “그런데 정말 우리 게임을 가지고 싶었어요.”

발더스 게이트의 성공은 과거가 되었고 동시에 폴란드 시장에서 배급을 하는 “대단한 모험”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 쪽에서는 새로 생겨난 소매 체인점들과 다른 쪽에서는 신생 퍼블리셔들과의 경쟁하며 길을 개척하는 즐거움은 사라져 갔다. 이빈스키와 키친스키는 자신들의 현 상황을 살펴보며 자문했다. “우리가 정말 그냥 패키지 옮기는 일에 그치고 싶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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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프로젝트 RED의 원년 멤버다. 왼쪽 상단의 아담 바도스키가 보이는가? 그 바로 옆에 게럴트가 있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계기’를 준 것은 당시 인터플레이에 있었던 저명한 게임 인사 퍼거스 어크하트(옵시디언)와 데이브 페리(가이카이)였다. 그들은 CD 프로젝트에서 발더스 게이트: 다크 얼라이언스를 폴란드에 배급해주길 원했는데 폴란드는 PC 게임 뿐이었다. 팔리지 않을 게 뻔했다. “그럼 거기서 이식하면 어때요?” 인터플레이가 물었다. “물론이죠!” 폴란드 사업가들은 답했다. “해보죠.”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 프로젝트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당시 폴란드의 스타 개발자였던 세바스티안 지엘린스키였다. 지엘린스키는 폴란드 전역을 강타한 울펜슈타인 짝퉁 모르티르 2093-1944를 만든 사람이었다. 지엘린스키는 프로젝트를 이끌어 주었는데 진짜 횡재는 그 뒤를 이어 들어온 직원, 영화 스토리보드 아티스트였던 아담 바도스키였다. 그는 오늘날 CD 프로젝트 RED 스튜디오를 책임지고 있다.

인터플레이의 런던 사무실에서 폴란드로 플레이스테이션 2 개발킷이 넘어왔고 다크 얼라이언스 PC판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다크 얼라이언스 계약이 깨졌다는 인터플레이의 전화였다. “하지만 이미 열의가 충만한 상태였어요.” 이빈스키는 말했다. 그들은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뭘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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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사에 물든 나라 폴란드에 ‘비에치민’, 즉, 위처보다 큰 판타지 라이선스는 없었다. (사실 ‘위처’라는 말은 CD 프로젝트에서 만든 영어 번역이다.)  이 소설을 쓴 안제이 사프콥스키는 비디오게임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었지만, 그 너무도 훌륭한 판타지 때문에 폴란드의 톨킨으로 여겨진다. “그 사람은 그런 사람입니다.” 이빈스키는 강조했다. “그 누구와도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이에요. ‘사프콥스키’ 하면 둘도 없는 일류입니다.”

그런 대단한 위신 때문에 이빈스키는 게임 권리를 얻을 수 있을 거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회가 있었다. 권리를 얻어 놓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한 폴란드 모바일 게임 회사로부터 낚아 챌 기회가 있었다. “사프콥스키와 접촉해서 물어봤습니다. ‘게임이 실제로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가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작가이지 사업가가 아니었던 사프콥스키는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직접 알아보세요.” 그의 대답이었다. 그래서 알아보았다. 그들은 모바일 게임이 제작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안을 주세요.” 사프콥스키가 답했다. 그래서 제안을 주었다. “굉장히 많은 돈은 아니었습니다.” 이빈스키는 회상했다. 하지만 얻어낼 수 있었다. “권리를 얻었는데 거기서 진짜 어려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게임을 하나 만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만들지 몰랐으니까요.”

먼저 할 일을 먼저 했다. 스튜디오를 차렸다. 세바스티안 지엘린스키의 팀은 워쇼에 위치한 CD 프로젝트에서 남쪽으로 120 킬로미터 떨어진 우치라는 마을에 자리를 잡아 CD 프로젝트 RED가 되었다. 상당한 거리였기에 이빈스키와 키친스키는 자주 찾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 폴란드 전문가의 지도 아래 CD 프로젝트 RED는 1년 만에 데모를 만들었다. “쓰레기 덩어리였습니다.” 아담 바도스키가 킬킬 웃으며 말했다. “마르친과 미할에게 그 데모 가지고 출장 가지 말라고 설득하려고 했는데…결국 갔어요.”

두 사람은 데모를 자신들이 마련할 수 있는 가장 비싸고 강력한 랩탑에 담아 유럽 전역의 열 곳이 넘는 퍼블리셔들에게 보여주었다. “2주 동안 여러 차례 미팅을 가진 결과 두 통의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아주 영국 신사스럽게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라고 써있더군요. 그러니 사실상 ‘집에나 가라, 아그들아’였죠. 마음이 찢어졌습니다. ‘아, 우린 정말 구리구나’ 싶었습니다.”

세바스티안 지엘린스키는 첫 데모가 나올 즈음에 스튜디오를 떠났다. “어느 날 우치 사무실에 갔어요. 그 전에 지엘린스키에게 우치 사무실을 닫고 바르샤바로 옮길 거라고 했었는데 지엘린스키는 그렇다면 더이상 생각이 없다고 하더군요. 저희는 다른 모든 직원들에게 일자리를 제안했고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커다란 택시를 잡아서 장비를 싣고 그날 바로 바르샤바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창고에다가 넣어놨죠.” 그리고 오늘까지 거기 그대로 남아있다.

미할 키친스키가 개발을 이어받았고 바이오웨어가 (오로라) 엔진으로 도움을 주었다. 이빈스키는 그렉 제스척과 레이 무지카와 친했고 바이오웨어는 더 나아가 데모가 좋다면 E3에 시연 자리까지 주겠다고 했다. 데모가 좋았으니 바이오웨어는 자리를 제공했다. 위처는 2004년 제이드 엠파이어의 축제 속에서 눈에 띌 수 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바이오웨어는 드래곤 에이지를 발표했다. 내년에 위처와 정면으로 맞서게 될 시리즈고, 이번에는 대등한 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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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로 사무실을 옮긴 후 아담 바도스키의 지저분한 책상

초기에 CD 프로젝트 RED는 15명이면 위처 1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결국 100명이 5년 동안 만들면서 2천만 폴란드 주오티(이빈스키가 생각하기에 지금 돈으로 1천 2백~1천 6백만 파운드 정도)가 들어갔다. “그게 저희가 가진 돈의 전부였습니다.”

폴란드에는 팀을 채울 게임 개발자들이 없었고 CD 프로젝트 RED는 해외에서 사람들을 끌어들일 만한 국제적 연줄도 없었다. 대신 게임에 열정을 가지고 있고 새로운 걸 시도해보고 싶어하는 은행원과 의사와 온갖 직업의 사람들이 전직해왔다. 하지만 CD 프로젝트 RED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들은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 사람들도 배우고 있었다.

팀이 발더스 게이트만큼 복잡하고 위처 판타지만큼 웅장한 걸 만들려고 하면서 아이디어들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왔다. 게임은 두 번 혹은 세 번 정도 축소 작업을 거쳤지만 그래도 100시간의 게임플레이가 나왔다. “만약 잘라내지 않았다면…” 나는 말을 끼어들며 물었다. ‘스카이림보다 더 컸을까요?’ “아뇨.” 그는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듣고 웃으며 말했다. “아마 그 때 사업이 끝났을 겁니다.”

아타리가 퍼블리셔로서 가장 좋은 계약을 제시했고(코드마스터즈와 코흐 미디어도 있었다) CD 프로젝트 RED는 더 깊게 파고들었다. “반년 동안 매일 12시간, 주말 내내 일했습니다.” 리드 캐릭터 아티스트 파베우 미엘니추크가 말했다. 아담 바도스키는 책상 밑에서 잠을 잤다. “진짜로요! 사흘 동안이나, 같은 옷을 입고요. 냄새나는 시절이었죠.” 미엘니추크는 낄낄거렸다.

“게임은 완전 난장판이었어요.” 미엘니추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에 모두 하나로 모여졌죠. 정말 굉장했어요. 왜냐면 여기저기 흩어진 조각들이 모여서 하나의 게임으로 만들어질 거라고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요.”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던 CD 프로젝트 RED는 해냈다. 그리고 2007년 가을 위처 1이 출시되었다.

[위처 1이 나오고 바로 오로라 엔진을 활용해 PC용으로 위처 2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개발은 유출된 이 테크 데모 정도까지만 진행되었다.]

“만약 당신이 매력적으로 묘사된 환경과 찬사 받을 만큼 현실적인 사회적 상호작용, 피로 가득한 판타지 스토리텔링의 팬이라면 의자를 바짝 잡아당기시라.” 당시 본지 리뷰는 이렇게 썼다. “위처에는 그런 게 아주 많으니까.”

명작은 아니었지만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고 비평에서도 상업적으로도(오늘날까지 200만 장 이상을 팔았다) 후속작을 보장할 만큼 따뜻한 반응을 얻었다. 그리고 이제 CD 프로젝트 RED가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위처 1의 인핸스드 에디션(위처 2와 마찬가지로 기존 소유자에게 무료 패치로 제공되었다) 이후 위처 2와 위처 3 두 프로젝트가 동시에 시작되었다.

위처 3는 콘솔로도 게임을 낼 수 있는 엔진을 만드는 프로젝트였다. 바이오웨어의 오로라 엔진은 콘솔에 대응하지 않았고 콘솔은 CD 프로젝트 RED가 언제나 가고 싶었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위처 2 이후 새 엔진으로 옮길 계획이었다.

위처 2는 다시 오로라 엔진을 사용해 PC용으로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당시 아담 바도스키가 생각하기에 “멋져 보이는” 테크 데모에서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반갑게도 이 영상이 유출된 덕분에 위에서 감상할 수 있다. “우리 회사는 유출이 정말 많았죠!” 바도스키가 웃었다.

오로라로 만드는 위처 2가 거기까지 밖에 가지 못한 것은 위처: 화이트 울프가 미쳐 날뛰면서 그 계획을 다 날려버렸기 때문이었다.

*    *    *

화이트 울프는 위처 1을 콘솔 버전으로 만들던 것이었고 아타리의 아이디어였다. 이빈스키는 앞으로 나올 게임을 위해 콘솔에서 브랜드를 다지자는 논리를 이해했고 그래서 처음에는 주저하다 계획에 동의하게 되었다. 결국 실수가 되었지만 그 당시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CD 프로젝트 RED는 내부에서 화이트 울프의 개발을 다룰 여력이 없었으므로 인상적인 제안을 한 프랑스의 와이드스크린 게임즈에 일을 맡겼다. CD 프로젝트 RED가 통제하길 원했으므로 아타리는 CD 프로젝트 RED에게 게임의 개발비를 지불했다.

5개월 뒤에 문제가 생겼다. CD 프로젝트 RED는 도움을 주려고 열 명 정도의 개발자를 프랑스 스튜디오로 보냈다. 더 많은 문제가 나왔다. 이빈스키는 와이드스크린이 마일스톤에 도달해서 돈을 받는 것 이상의 열의가 없지 않나 의심하기 시작했다. 리옹에서 아타리와 가질 회의에서 보여줄 중요한 데모의 제작을 돕기 위해 바도스키가 파리의 스튜디오로 날아갔다. 폭풍이 지나가고 데모는 환호가 나왔다. 하지만 2주 뒤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났다. 와이드스크린이 화이트 울프를 네 다섯 달 정도 더 미뤄줄 것을 원했다.

그만하면 됐다.

“그 모든 갈등과 전화로 멍청한 의논을 한 시간들, ‘그건 범죄다’했던 말 같은 건 이야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 사람들이 게임을 만들어낼 방법을 몰랐다는 겁니다.” 매달 CD 프로젝트 RED에 쓰이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이 와이드스크린 게임즈에 들어갔다. 위기를 이야기할 때였다. 상황의 심각성을 판단해야 할 때였다.

“5일 간의 조사를 거치고 나서 저희는 저녁에 리옹의 카페에 앉았습니다. 아마 다섯, 여섯 명이었을 건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죠.” 대답들은 갈수록 걱정스러워졌다. 한 사람은 와이드스크린이 화이트 울프의 개발을 끝내려면 30명을 더 투입해서 1년이 더 걸릴 거라고 봤다. 그러자 누군가 말했다. “그냥 취소하고 다른 게임 만들자! 그 사람들이랑 일하는 것보다 훨씬 쉬울 거야.” 눈이 확 뜨였다. “이야기를 나눈 다음날 아타리에게 프로젝트를 중단해야겠다고 전했습니다.”

아타리는 불만이었다. 그 누구도 아닌 필 해리슨(한때 소니에 있다가 지금은 마이크로소프에 있고, 그 사이에는 아타리에 있었다)이 프랑스로 날아와 양쪽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빈스키는 그 미팅을 기억한다. “저희가 탁자 한 쪽에 앉아있었고, 와이드스크린 게임즈가 반대쪽에 있었고, 필이…” 그는 강조하며 말했다. “중간에 앉아있었죠. 저희는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쪽에서 저희 탓을 하니까 저희도 그쪽 탓을 했죠.”

[화이트 울프 트레일러]

험악해진 해리슨이 마르친 이빈스키와 미할 키친스키를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갔다. “영국인다운 말을 했지요.” 그는 악센트를 흉내 내며 말했다. “‘이건 진짜 지랄 맞은 상황이군.’ 그래서 저희는, ‘맞습니다, 필. 죄송해요. 완전 엉망이 됐습니다.’ 했습니다.”

“당시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저희는 이미 많은 돈을 날렸습니다. 저희 돈이요. 그리고 다음에 연락을 했을 때 필이 말하길, 정말로 정말로 미안하지만 아타리 쪽에서 저희한테 통보장을 보낼 것이고 저희는 그쪽에서 받은 돈을 갚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이빈스키는 뉴욕으로 날아가 협상을 했고 게임이 만들어지기 몇 년 전에 위처 2의 북미 유통권을 주는 계약을 하게 되었다. “이거라면 화이트 울프로 진 빛을 갚겠군요.” 아타리는 선언했다.

2009년 5월, CD 프로젝트 RED는 위처: 화이트 울프의 개발이 중단되었음을 확인해주었다. 실제로는 모든 것이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다시 사용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이빈스키는 한탄했다.

*    *    *

CD 프로젝트 RED는 위처 3를 백지화하고 만든 엔진을 활용해 위처 2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다만 엔진이 완성되지 않아 위처 2 개발의 전반전은 프로토타입도 테스트도 없이 어둠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세계 경제 위기가 CD 프로젝트의 무릎을 쳤다. 마르친 이빈스키의 경력에서 가장 섬뜩한 순간이었다.

이 압박감에 시달렸던 시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행동은, 그런 상황이라도 이빈스키가 퍼블리셔와 서둘러 계약해서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창조적 통제권을 위험에 빠트리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위처 1은 제대로 된 계약을 하려고 아타리와 6개월 간 씨름했었다. 다른 신생 스튜디오라면 굴복했을 테지만 이빈스키는 굽히지 않았다. 오늘날, 위처 3는 완전히 CD 프로젝트의 돈으로 만들어진다. “우리는 사실상 직접 퍼블리싱을 합니다.”

위처 2는 모든 부분이 야심 차고 엔진을 동시에 만들어야 했음에도 전작이 만들어진 시간의 절반이 들어갔다. ‘꽃들의 계곡’이라는 지역은 “굉장한 스토리”가 있었음에도 전체를 잘라야 했다. “소녀스러운 지역은 아닙니다.” 아담 바도스키가 덧붙였다. “엘프의 땅이에요.” 위처 세계에서 엘프는 다른 어떤 종족 만큼이나 더럽고 비열하다. 게임의 세 번째 장은 시간이 부족해서 또 잘려나갔다.

[엑스박스 360용 위처 2. 3년 전 오로라 테크 데모는 상당히 시대를 앞서가 있었지만 콘솔로 옮길 수 없었다.]

결국 2011년 5월 출시된 게임은 위처 1에 비해 커다란 진보로 기록되었고, 위처 2는 CD 프로젝트 RED를 빅 리그로 들어가게 해주었다. “그 균형과 캐릭터, 스토리텔링은 말 그대로 어떤 경쟁자도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이다.” 본지 리뷰는 당시 이렇게 썼다. “이 게임이 플레이어를 응석받이가 아닌 성인으로 대하는 방식도 그렇다. 플레이어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고 모두가 만족할 수 없는 이야기 속에서 고통 받는다.”

더군다나 스튜디오의 RED 엔진으로 콘솔 진출 야망을 마침내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1년 뒤 위처 2의 인핸스드 에디션과 함께 엑스박스 360 버전이 출시되었다. 스튜디오의 상황을 생각하면 대단한 기술적 성취였다.

*    *    *

2012년 봄, 곧 또 다른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 “차세대 콘솔은 어떻게 할까?” 그 때는 누구도 차세대 콘솔이 어떤 모습일지 몰랐다.

“하지만 곧 저희가 오픈 월드 게임, 커다란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CD 프로젝트 RED에게 기대하는 게임은 훌륭한 스토리가 있고 동시에 퀄리티와 그래픽에서 끝내주는 RPG입니다. 그런 게임은 구세대 콘솔에 들어가지 않지요.” 이빈스키는 말했다. “구세대 콘솔이라면 너무 많은 걸 희생하고 아예 다른 게임을 만들어야 합니다. 위처 2.5일지도 모르죠. 안 될 말입니다.”

“당시에는 굉장히 대담한 결정이었습니다. 많은 스튜디오들이 말도 안 된다고 하겠죠. 순수하게 상업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다섯 개 플랫폼으로 모두 내놓는 게 최고겠지만, 그러면 저희가 만들려는 게임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건 다른 게임이 되겠죠. 이 게임이 아닐 겁니다.”

그래서 CD 프로젝트 RED는 다시 더 위를 노렸다. 처음으로 멀티플랫폼 개발을 하면서 무시할 수 없는 크기의 오픈 월드를 만든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부분들은 전체의 작은 부분일 뿐이다. 아직 만들어질 것이 많다. 그렇다면 얼마나 더 만들까? “모릅니다!” 바도스키가 소리쳤다. “그건 아주 단순한 질문이고, 일반적인 질문이고, 저희는 제작 문서도 갖추고 있지만, 게임은 아직 90퍼센트 완성되지도 않았습니다. 전혀 완성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전체 스토리라인은 갖춰져서 구현되었네요. 어떻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내 주변에 있는 팀은 “아주 중요한 데드라인”을 향하고 있었다. 언론에 선보인 다음 대중에게 공개할 게임플레이의 한 부분이었다. 공개 계획은 올해다. 하지만 확실하게 못 박은 것은 아니다.

위처 3는 언제 출시될까? 베일에 싸여있지만 2014년 2분기 이전에 나올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언제 나오든 위처 3는 CD 프로젝트에게 한 시대의 끝, 안제이 사프콥스키의 세계를 활용한 10년이 넘는 시대의 끝으로 기록될 것이다. (사이버펑크 이외에 그 다음에 무엇이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위처 3는 CD 프로젝트 RED를 게임계의 거물로 만들어줄 것이고 위처 시절은 절벽을 올라가 조명 안으로 들어오게 된 여정으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그 조명은 그 밝기 만큼이나 가혹하다. 그리고 더 이상 언더독이 아닌 CD 프로젝트 RED는 기대라는 이름의 압박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어쨌든 그것은 미래의 일이다. 내년으로 마르친 이빈스키는 40세다. CD 프로젝트의 모험을 시작한지 20년 되는 해다. 그 옛 시절 대담하게 컴퓨터 시장에 뛰어들었던 이빈스키는 그동안 많은 것을 이루었다. 이빈스키가 절감하며 이야기하듯 그것은 홀로 이룬 것이 아니다. 그 모든 우여곡절마다 미할 키친스키나 미할의 형제 아담 키친스키, 피오트르 니엘루보비치, 아담 바도스키의 도움이 있었다. 그들과 또 다른 사람들이 없었다면 이빈스키는 여기 오늘 내 앞에, 파란 후드와 청바지를 입고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폴란드의 모범일 뿐 아니라 세계적인 모범이 된 회사에 둘러싸여 앉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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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내 앞에 앉아있는 이빈스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그는 이야기했다. “저희의 가장 큰 성공은 재능 있는 사람들을 찾고 함께 해왔다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의 가족을 이루었다고 하고 싶네요.”

“물론 어디든 그렇듯이 어려운 순간들도 있지요. 하지만 굉장히 독특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 분위기가 계속 유지된다면, 게임에 열정을 지니고 있다면, 모두 자기가 하는 게임과 본 것, 읽은 만화에 대해 미친듯이 말한다면, 그냥 매일 숫자 넘기는 일 이상을 할 수 있다면, 이 모든 게 말이 됩니다.”

“중요한 건 바로 게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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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oughts on “CD 프로젝트 이야기”

  1. 그냥 지나치기 힘든 글이군요. 너무 잘 봤습니다. 위쳐1 부터 즐겨오며 CD프로젝트에 관심이 많았는데, 역시 보이지 않는 우여곡절이 많았군요. 이 글을 읽으면서 더욱 흥미가 가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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